유감스럽게도 미국의 변화가 세계 각국의 법재정이나 국가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특히 한국은 그 정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많은 축에 속한다. 낙태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메이저리그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낙태에 관한 논쟁은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vs 민주당(물론 민주당 소속 정치인 중 낙태찬성을 대놓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종교계 vs 진보진영, 종교계 vs 여성계, 종교계 vs 과학계 등지로 전선이 형성되어 있으나 근본적으로 낙태에 관한 반대진영은 기독교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고 낙태에 관한 찬성진영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근본으로 하지만 사회 계급, 여성, 과학 등 각자의 중점에 따라 찬성의 근거는 다변화되는 양상이다. 우선 찬반 양진영의 이론적 토대 부터 살펴보자.
낙태 반대진영 - pro-life
기본적으로 프로라이프 진영의 이념적 바탕은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타협이나 양보가 허용되기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이 임의로 거역할 수 없다는 절대적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겐 언제 부터 생명이 시작되는지, 어떤 상태를 인간으로 간주할지 등 낙태 찬성론자들의 이념적 토대 위에서 마련된 논쟁에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가치에 도전하는 어떤 의문과 담론도 그들에겐 신성모독이며 죄악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의 프로-라이프 진영과 토론하는 일은 프로-초이스 진영에게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진영이 프로-초이스의 주축인것에 반해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되려 프로-라이프 진영에도 큰 축을 이루고 있다는 거다.
낙태 찬성진영 - pro-choice
프로-라이프 진영이 비교적 단순한 이념적 배경을 갖고 있는것과 달리 프로-초이스 진영은 사뭇 양상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페미니즘이 프로 초이스 진영의 주축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의 프로-초이스를 한국에서 계승한 주축이 페미니즘 성격인것은 어느정도 맞지만 미국의 pro-choice의 가장 두터운 주축은 뭐니뭐니해도 사회과학진영이다. 이들은 사회, 경제, 윤리, 도덕 등 낙태와 관계된 대부분의 사회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전방위적으로 낙태 찬성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진영엔 진보계 정치인, 교육계, 여성계, 심지어 종교계도 속해있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고 경우에 따라 각각의 낙태 찬성 논리가 서로 대치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각각의 논리들 중 핵심은, 낙태는 산모의 결정사항이라는 거다. 국가가 공권력으로 개인의 출산을 강제하는 것은 인권침해요, 국가에 의한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프로-초이스 진영 사상가와 과학자들은 산모에게 안전한 낙태의 시기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발행하고, 어떤 단계 부터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프로-라이프 vs 프로-초이스는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나?
적어도 미국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1973년 부터 임신후 최고 6개월 까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낙태에 대한 선택권은 산모에게 있다. 즉, 사실상 미국에서 낙태는 합법에 가깝다. 따라서 낙태 찬반 논쟁에 있어 반대 진영의 목소리가 보다 공격적이고 적극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90년대 초에 연방대법원에서 주정부가 낙태를 규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어 준 후 부터, 낙태 찬반 논쟁은 양 진영 모두에게 격렬하고 첨예한 상황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인구 대비 낙태율이 세계 최고로써 명실공히 낙태의 왕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법은 사실상 빙다리 핫바지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는 낙태에 대한 공식적인 불법화/합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것 같다. 알다시피 힌국도 임신 3~4개월 까지는 합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프로-초이스 진영이 페미니스트들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이들의 낙태 찬성 요구는 오히려 미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경향이 적지 않다. 즉, 산모-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절대적인 것으로써 최대한 보장하는 것만이 정의라는 주장이다. (물론 개중엔 비교적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도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비해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기서 부터 묘한 상황이 전개되는데 절대성은 종교진영의 전유물로써 그들과의 토론이나 타협이 불가능한 미국의 상황이 한국에서는 양 쪽 진영 모두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거다. 한국의 프로-라이프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이념적 토대로 하기에 그들의 절대성은 미국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프로-초이스는 미국과 달리 페미니즘 진영이 주축이기에 각자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이론적 토대 보다는 여권이라는 절대적 가치가 전제가 되는 양상이어서 양진영 모두 토론이나 타협은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거다.
물론 한국의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가 모두 내가 언급한 부류들에 국한해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외 다양한 목소리와 성향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이 주류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그들의 견해를 따로 다루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프로-라이프와 프로-사형제는 어째서 양립하고 있는가?
미국의 프로-초이스 진영이 막강한 프로-라이프의 도덕적 권위에 맞서기 위해서는 나름의 특별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들은 프로-라이프 진영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여 그들의 절대성에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프로-사형제도다. 특히 미국의 보수성향의 택사스 주는 해마다 다른 모든 주들을 합친 수 보다 적게는 수배에서 많게는 수십배에 달하는 사형집행이 이뤄지는 주면서 동시에 낙태에 대한 제도적 규제와 종교계의 반대가 가장 극렬한 지역 중 하나다. 프로-초이스는 이에 그들에게 회심의 일격이라 믿었던 카드를 던진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사람이 임의로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낙태가 금지되어야 한다면, 사형제도 역시 같은 이유로 중단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여기서 프로-초이스 진영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어쩌면 종교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프로-라이프 진영은 이 논리적 공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았다. 혹자-예컨데 한국 남성들이 사랑하는 조던 피터슨 같은 경우-는 공리주의 이론을 빌려와 이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려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진정한 프로-라이프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나약한 방식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오직 성경에서 프로-라이프의 절대성을 찾았던 만큼, 사형제 문제 역시 성경에서 그들은 해답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까지 종교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싶진 않다만, 종교인들이 그들의 자녀 교육에 열성인 모습을 보면, 그들의 저런 미신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일이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프로-라이프 주류의 태도는 여전히 변한게 없지만, 일부 프로-라이프 진영의 사람들에게 프로-사형제 공략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다. 앞서 얘기한 것 처럼 일부는 공리주의 사상을 건들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했으며,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등, 대부분 프로-초이스 진영이 마련해둔 이론적 링 위에 그들을 서게하는데에 큰 성과를 거둔 셈이다. 프로-초이스 진영에게 있어 상대가 절대성이라는 울타리를 스스로 넘도록 하는 일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진보에 다름아닌 셈이다.
이상의 치열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부는 페미니즘의 구호 아래서 전개되기도 하고, 일부는 정치적 색깔을 띠고 전개되기도 하며, 일부는 의사나 과학자의 옷을 입고 전개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위에서 언급한 논리적 토대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자의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는 형국이다.
얼마전 뜻하지 않게 낙태 논쟁이 잠깐 있었다. 서로 낙태에 대한 다양한 개인적 견해를 듣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낙태찬반 논쟁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쟁점을 벗어나 각자 개인이 만든 쟁점 안에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은 나로써 그닥 큰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이런 작은 커뮤니티에서의 토론이, 세기의 논쟁에 어떤 유의미한 기여를 할꺼라 기대하긴 어렵더라도, 적어도 어떤 주장이 어떤 논리적 토대에서 전개되어 왔고, 그것이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는 기본으로 하고 각자의 입장을 정리해 보는것이 아주 작게나마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PS. 나는 늘 궁금했다. 어째서 극도로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쪽은 늘 다수인 당신들 몫이고, 유머게시판 답게 웃으며 드나드는 쪽은 늘 소수인 내 몫인가?
출처: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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