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조 0시간 안명훈씨 “360시간 필요한데”
“시설 동료에게도 자립생활 권해 같이 사는데”


▲활동보조시간 360시간이 필요한 안명훈씨에게 0시간 판정이 나왔다.

뇌병변 1급 장애인인 안명훈(29)씨는 8개월 전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인천시 계양구에 위치한 민들레장애인야간학교에 딸려있는 단칸방. 비록 작은 방이지만 그에게 주체적인 삶을 허락한 소중한 보금자리다.

8년이나 거주했던 시설에서 과감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립생활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외부 활동 없이 집에서 갇혀 살기가 두려웠다. 가족이나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은 TV프로그램 맘대로 볼 수 있고, 누구 허락 없이 밖에 나갈 수 있는 것. 이것만으로도 자립생활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요? 시설에서는 권리도 없었지만, 권리를 내세울 힘은 더더욱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감도 생겼고, 권리의식도 생겼어요. 자유와 권리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얘기죠.”

그는 시설 밖에서의 생활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같은 시설에 거주했던 길희진(32·뇌병변1급)씨에게도 자립생활을 권유했고, 얼마 전부터는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안씨는 함께 살아갈 동반자가 생겨 훨씬 든든하다고.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죽어요”…자립의지 꺾은 복지부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자립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활동보조인이다. 이들에게 활동보조인은 생명 줄이나 다름없다.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휠체어에 올라탈 수도 없다. 반대로 이들에게 활동보조인이 있으면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시설에서 살지 않아도 되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활동보조인이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안씨는 “죽어요”라고 말했다.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안씨에게 활동보조인은 생명이자 생활이다.

사실 길씨가 안씨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인 것은 올해부터 정부지원사업으로 시작된 활동보조지원사업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인천시가 시행했던 시범사업을 통해 안씨는 ‘180’시간을 지원받고 있었고, 정부지원사업으로 정착되면 분명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4월말 활동보조 이용시간 판정을 받은 후 두 사람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난 5월 30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장례식에 참석한 안명훈씨. ⓒ에이블뉴스
“활동보조사업 믿고 시설서 나왔는데”…시범사업보다 시간 줄어

바로 터무니없는 시간배정 때문이었다. 안씨에게 ‘이번 정부지원사업에서 활동보조 시간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묻자 ‘빵 드실래요?’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빵’(0)시간 판정을 받은 자신의 상황을 돌려서 설명한 것.

보건복지부가 그에게 배정한 활동보조 서비스 시간은 ‘0’시간. 복지부의 판단에 따르면 안씨는 활동보조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안씨는 “복지부가 나보고 비장애인이래요”라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안씨와 장애 정도가 비슷한 길씨는 ‘40’시간 판정을 받았다는 것. 방문조사원의 판단에 따라 판정결과도 들쭉날쭉 원칙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천시에서 기존의 인천시시범사업을 이용하던 지역장애인에 한해 ‘80’시간까지 보장해주기로 결정함에 따라 각각 80시간씩 지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여전하다. ‘80’시간이면 하루에 2시간 30분가량. 활동보조인이 아침에 와서 밥해주고 옷 입혀주면 거의 소진된다. 목욕한번 하기 바쁘고, 외출은 꿈도 꾸기 어렵다.

인천시 시범사업 당시, ‘180’시간을 지원받고도 시간이 모자라 민들레야학 식구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개인 돈을 털어 넣었던 그였다. 두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얼마만큼의 활동보조 시간이 주어져야 할까? 일단 식사와 신변처리만 생각해도 하루 12시간은 필요하다. 한달로 치면 360시간이다. 현 상황에서 360시간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꿈도 야무지다”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보치아 금메달리스트 안씨 “활동보조 지원되면 또 금메달 따겠다”



▲동료 길희진(맨 앞)씨와 함께 거리로 나선 안명훈씨. ⓒ에이블뉴스
안씨에게 활동보조인이 절실한 이유는 가슴속에 묻어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다. 안씨는 보치아 국가대표 선수다. 지난 2004년 아테네장애인올림픽에서 박성현 선수와 함께 ‘보치아 BC3등급 복식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이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활동보조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장애인이라고 삶에 대한 애착이 없겠습니까? 세상이 흥미로워하는 일에 함께 웃고 싶고, 보다 넓은 세상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꿈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들은 활동보조사업을 그저 서비스의 하나로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활동보조인은 내 몸의 일부이며,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정부의 지원만 있다면 국제적 대회에서 또 한번 금메달을 따낼 자신도 있습니다. 중증장애인들의 삶에 대한 열정을 정부가 짓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7-06-01 14:06:35

주원희 기자 (jwh@ablenews.co.kr)